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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p "Sign of Summer"

by cypress | 2008/09/07 20:19 | 음악 | 트랙백 | 덧글(0)

레닌 커리큘럼


촛불 시위가 일정하게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겉보기에는, 이쪽이 수세에 몰렸고 이명박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바짝 드잡이를 하는 형세다.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명박의 지지율은 매우 낮고(이게 촛불 운동이 낳은 성과라는 점을 상기하자) 경제 촛불이 언제 다시 타오를지 아무도 모른다(쇠고기 반대 시위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더구나 다음 번에 타오를 촛불은 쇠고기 반대와 같은 단일 쟁점 투쟁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 운동으로 터져나올 것이다(이것도 촛불 운동의 성과다).

무엇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얘기한 바대로, 대규모 저항은 항상 조직과 의식이라는 비옥한 퇴적물을 반드시 남긴다. 새로운 급진적인 청년 세대가 출현했다. 우파 정권에 맞서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운동 참가자들도 많다(물론 이 말은 일면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 탄압이 촛불 운동에 대한 탄압임을 깨달은 사람도 있고, 우리보다 '못한' 태국에서도 총리가 물러나는데 다음 번 투쟁에서라면 이명박도 퇴진시킬 수 있다고 상상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조직화에 대해 생각하고, 정치를 연결시키며, 투쟁이 승리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반가운 일이다. 물론 한반도 상공에 두리운 지배적인 의식 지형의 구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수 대중은 소위 말하는 '합리적' 재조정을 통해서 부분적 개혁, 곧 개량주의적인 정치학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아주 소수는 사태의 본질을 꿰뚫고, 국가 권력의 문제를 숙고하면서 레닌을 읽을 필요성을 절감하기도 할 것이다. 아래의 커리큘럼은 그런 분들을 위해 내놓는 것이다.

50권 내외로 꾸며진 레닌 전집--보통 46권이라고 하는데, 빠진 것들이 있다--에서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다섯 권만 추려서 소개한다. 그리고, 정치적 전기와 가장 훌륭하다고 판단되는 해설서, 마지막으로 입문서를 추천하면서 사족을 조금 붙일 것이다. 초심자라면 거꾸로 접근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레닌의 책을 딱 한 권만 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국가와 혁명>을 읽어야 한다.
한국의 반문화 장사꾼들 사이에서는 '탈주'와 '자율주의'가 유행이라지만,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혁명이 국가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승리한 적은 없었다. 레닌의 책 중에선 제일 쉽기까지 하다. 도대체 '이중 권력'이 무엇인지, 거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성서>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또 좌익 문서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냉전 시대에 소련이 제3세계에 보급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되지만 과연 위의 진술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로 언급할 책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다. 레닌의 이 경제학 논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신을 담고 있다. 짧아서 읽기도 쉽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책은 조직과 활동의 원칙 및 전략 전술에 관한 내용을 다룬 두 권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와 <'좌익' 공산주의: 철부지 같은 혼란>이 그 책들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볼셰비키 정치의 핵심 원리를 담고 있다. (사실, 레닌 자신도 이 문서를 쓸 때 그 원리가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작용할지 몰랐다.) 읽기가 쉽지는 않다. 사실 (레닌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좌익' 공산주의: 철부지 같은 혼란>은 레닌이 쓴 문서 중에서 아마도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전술 문건일 테다.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며, 공동 활동을 벌이는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이다. 어렵지만, 읽을 만하다. 흥미진진하다.





마지막 다섯 번째 책은 고민하다가 고른 것으로, 신평론에서 나온 <레닌의 반스탈린 투쟁>이다. 레닌이 말년에 스탈린을 견제하기 위해 벌인 투쟁을 다룬다. 레닌과 스탈린이 어떻게 다른지, 레닌 사후 스탈린이 득세하면서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타락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레닌은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 문제에 직면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글을 썼다. 따라서 앞에 소개한 다섯 권을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레닌의 생애를 '정치적으로'--그는 정치가였으므로-- 해설한 전기를 읽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에 오염되지 않았으며, 읽기도 쉬운 3권짜리 전기가 있다. 바로 토니 클리프의 <당건설을 향하여>(책갈피)이다.



3권짜리라고 했지만 두 권은 아직 안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권이 올해 말이나 내년 초쯤에 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영국인으로 슬라브학의 대가라고 하는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전기>는 권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만화로 보는 레닌>을 읽기 바란다. 압축적이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정치적 입장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작정하고 레닌주의를 찬찬히 탐구해 볼 요량이라면--그리고, 반드시 그래야 하는데-- 최고의 책이 있다.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풀무질)가 바로 그 책이다. 브뤼셀의 정치사회학자 마르셀 리브만의 역저다. 요즘의 날티나는 프랑스 지식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모름지기 책을 쓸려면 이 정도는 써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간략한 안내서를 소개하기로 한다.



<삐딱이들을 위한 레닌 가이드>는 단편적이지만, "레닌 읽기"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책자이다.


알라딘이나 예스24에서 블라지미르 레닌을 쳐보면 절판 내지 품절로 거의 초토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영목이 번역한 <지젝이 만난 레닌>이 어느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듯하다. 출판계와 인문 사회쪽 연구자들이 변형된 형태로나마 레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조짐이 감지되고는 있다. 나 자신 <레닌: 재장전>(듀크 대학교 출판부)이라는 책의 한국어판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다시금 레닌의 원전들을 풍성하게 만나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위에 소개한 간략한 프로그램은 나 스스로 다시 읽어보기 위해 짠 커리큘럼이다.




나 자신이 소개하고 싶은 책을 몇 권 적어놓는다.

 V. Serge, "Lenin in 1917"(in Revolutionary History 5/3, 1994)
Alfred Rosmer, Lenin's Moscow(London, 1987)
M. Lewin, Lenin's Last Struggle(London, 1967)
M. Haynes, Russia: Class and Power in the Twentieth Century(London, 2002)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에 가면 레닌의 여러 저작을 볼 수 있고, 사이트는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다.

by cypress | 2008/09/05 22:25 | topic | 트랙백 | 덧글(2)

정치란 무엇입니까?


정치란 무엇입니까?







정치는, 정의의 원리를 확립하는 활동(노력)이자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예술(art, 기예)입니다.



by cypress | 2008/09/05 14:51 | Q & A | 트랙백 | 덧글(2)

베란다의 나팔꽃


by cypress | 2008/09/05 14:42 | 이미지 | 트랙백 | 덧글(2)

맑스주의와 언어--이기웅


맑스주의와 언어



<맞불>이 제호를 바꿔 내는 신문 <저항의 촛불>에 실린 글이다. 이 신문의 먼 전신에서 한때 편집일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신문이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읽겠는가? (레디앙이나 프레시안에서? ㅋ ㅋ )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사이트를 방문해서 기사를 읽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후원도 할 수 있다. www.resistcandle.com 이기웅 교수와 보론을 쓴 최일붕 선배는 학교 선후배 사이이다. 더 사적인 내용도 조금 아는데, 그건 내 몫으로 남겨둬야겠다.


※ 이기웅 교수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러시아어 언어철학을 전공했다. 필자는 ‘다함께’가 주최하는 ‘맑시즘2008’에서 ‘맑스주의와 언어’라는 주제로 연설한다. (8월 17일(일) 오전 10시) 이 글은 이기웅 교수가 기고한 글의 첫 번째 부분으로 다음 호에 후속편이 실릴 것이다.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의 성공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혁신하려는 거대한 실천적인 시도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연히 이와 더불어 현실의 많은 것들을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구성해 내려는 지적인 노력들의 유례없는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인 노력들의 발전적인 행로는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전범으로 참조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그 출발부터가 다분히 암중모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령 언어학이나 문학, 미술 등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상이한 입장들과 경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됐다. 이 때문에 1920년대 러시아는 새로운 시도들로 넘쳐나는 역사상 가장 활발한 문화적 분위기였지만, 또한 이들 사이의 경쟁적인 갈등과 상충도 함께 있는 다소 혼재된 시기이기도 했다.

둘째, 이러한 와중에, 스탈린주의의 득세로 요약될 수 있는 사회·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서 그러한 지적인 노력들과 열망들은 일시에 억압적인 궁지로 내몰리게 된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그러나 그것의 실제적인 내용은 민족주의와 강압적인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차례차례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1928년 무렵 권력을 독점하게 된 스탈린은 그 다음 해에 실로 괴물과 같은 방식으로 예술과 학문의 전 분야를 “단일지도”의 원칙에 따라 재조직화를 착수한다.

이것은 각 분야마다 권력 당국이 지정한 책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인데, 이에 따라 당연히 예술가들이나 연구자들의 자율성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앞을 기다리고 있는 이처럼 험난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시도된 맑스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한 다양한 지적인 노력들이 오늘날까지도 내용적으로 많은 점에 있어서 그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규정하는 다음과 같은 방법적 토대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현실 속에 주어진 어떤 현상을 맑스주의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그것을 역사유물론에 기초해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여기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주어진 현상의 고찰에 있어서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종합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설명적 노력은 당연히 올바른 실천적인 방향성의 정립과도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이란 궁극으로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물질적 속박과 이로 인한 사회적 착취와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만큼 역사 또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총체화 과정 속에서 자리매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체적

이상의 것을 전제로 놓고 볼 때,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기호적 활동인 언어를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규명하려는 대표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가 볼로쉬노프(В. Н. Волошинов, V. N. Voloshinov; 1895~1936)의 《맑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이다.[이 책은 푸른사상 출판사에서 《언어와 이데올로기》란 제목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편집자]

먼저 이 책의 전체적인 집필 의도에 따르면, 맑스주의에서 언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란 원래 맑스가 생각한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즉 과학적 의식과 대립하는 허위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맺는 제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가치평가’라는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총체적으로 볼 때,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궁극으로 결정하는 물질적 토대인 하부구조와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것을 잘 반영하는 것이 그리고 또한 자기 내부의 법칙에 따라 굴절시켜서 현실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는 것이 바로 가장 일반적인 사회적 기호체인 언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볼로쉬노프가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휘체계나 문법체계의 층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소통행위를 구성하는 발화(發話)[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 편집자]의 층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 소통에 있는 이상, 언어 연구의 초점 또한 당연히 발화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소통의 상황과 문맥,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사회적 구조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발화행위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기에, 확실히 발화는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변증법적 총체성을 잘 구현하고 있는 언어적 사실이다.

이 점은, 가령 아주 간단한 예로서, “경찰이다!”라는 표현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화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실제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발화의 층위에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을 위치시키면서, 볼로쉬노프는 기존의 언어 연구들을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분류하고, 양자 모두를 비판한다.

하나는 언어가 민족정신이나 민족의 세계관, 민족심리, 혹은 민족의 미의식 등을 고유하게 반영하는 활동이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내는 활동으로서 개인의 언어적 창조성을 강조하는 경향인데 (헤르더 Herder, 훔볼트 Humboldt, 쉬타인탈 Steintahl, 분트 Wundt, 포슬러 Vossler 등), 볼로쉬노프는 이러한 경향을 과학성이 결여된 ‘개인적 주관주의’라고 비판한다.

다른 하나는 소쉬르(Saussure)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과학적 경향이다. 이에 따르면, 언어의 본질은 개인의 말이나 발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동시대에 개개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잠재적인 사회적 기호체계에 있으므로, 그러한 체계를 구성하는 구조적 사실들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입장을 볼로쉬노프는 ‘추상적 객관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 같은 기술은 언어기호가 발화를 통해서 표현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실제적인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화법

사실, 이러한 비판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언어와 연관된 다양한 현상들을 소쉬르나 볼로쉬노프 모두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론화시키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안점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우리가 든 예를 갖고 생각해보면, 소쉬르는 어느 누가 “경찰이다!”라는 표현을 발화하든지간에 모두 동일한 기호에, 따라서 동일한 ‘의미’(значение; meaning 혹은 signification)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볼로쉬노프는 그러한 동일성 위에 얹혀지는 상이한 발화자들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억양들, 목소리들, 실제적인 ‘뜻’(тема; theme)들의 현실적 중요성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물론 볼로쉬노프가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언어기호에서 ‘의미’와 ‘뜻’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주된 근거는 개인의 발화가 아무리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것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 타인을 지향하는 대화적 성격을 가졌으며, 발화의 이러한 대화적 구조를 규정하는 궁극적 요인이 바로 사회-이데올로기적인 사실들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볼로쉬노프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화법’이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언어 현상의 분석적 고찰에 할애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타자의 말의 재현 형식으로서 화법조차도 그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재현하는 발화자의 사회-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가치평가적 태도가 덧씌워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 준다.

요컨대,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단지 언어 내부로만 분석의 시각을 국한시키는 연구는 불충분할 수밖에 없으며,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어가 ‘인간의 현실적 의식’인 이상 그것을 구성하는 계기들을 종합화하는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로쉬노프의 이러한 이론적 노력은 1960년대까지 국제 학계에서는 물론 소련 내에서도 잊혀져 버린다.

1920년대부터 언어 연구의 국제적인 흐름은 소쉬르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구조주의가 주도적이었으며, 소련의 경우는 스탈린주의의 후견 아래 기계적 유물론을 강조하는 마르(Marr)의 교조적인 이론이 1929년부터 무시무시한 ‘감독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령, 이에 맞서 학문적 논쟁을 벌인 활동적인 맑스주의자이자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폴리바노프(Polivanov)는 박해를 받다 1938년에 총살당했던 것이다.

볼로쉬노프의 경우는 스스로 학문적 노력을 접은 채 침묵하다 요절했으며, 이러한 그의 저서가 마침내 재발견된 것은 소쉬르 식의 구조주의의 한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의 서구학계에서부터였다. (계속)


지난 호에 이어 이기웅 교수의 ‘맑스주의와 언어’ 후속편을 싣는다. 이기웅 교수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러시아어 언어철학을 전공했다. 필자는 최근 ‘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2008에서 같은 주제로 연설한 바 있다.

지난 호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데올로기와 언어의 밀접한 연관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면서 언어 현상을 발화(發話) 차원에서 고찰할 필요성을 규명하고 있는 《맑스주의와 언어철학》[국역: 《언어와 이데올로기》, 푸른사상 간]에서, 볼로쉬노프가 보여 주는 이론적 신중함과 미덕은 가령 기계적 유물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마르의 언어 이론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면 먼저 마르의 학설 중에서 우리의 논의와 관계되는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어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상부구조에 속한다. 따라서 언어의 발전 단계는 사회의 발전 단계에 대응된다. 그리고 계급적이지 않은 사고가 없는 것처럼 계급적이지 않은 언어도 없다. 심지어 동일한 민족의 경우에도 상이한 계급들을 초월하는 민족 공통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상이한 계급적 언어들 및 이들 사이의 교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만일 거기에 어떤 공통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교차의 반영으로서 궁극적으로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

2)
그리고 동일한 사회구조를 갖는 나라들의 동일한 계급의 언어들은 동일 민족 내의 상이한 계급들의 언어들보다도 유형적으로 더 큰 유사성을 갖는다. 따라서 모든 상이한 언어들은 장차 인류가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해 감에 따라 하나의 단일한 유형의 언어로 귀결될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터무니없이 사변적인 2)에 비해서 1)은 언뜻 보면 다소 그럴 듯도 해 보인다.(그런데 스탈린은 당시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필요한 것이 2)의 부분이었는지, 1930년 제16차 전소연방 공산당 대회의 연설에서 그것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인용한다.)

그러나 주장 1)의 이론적 근거이자 치명적 오류는 언어를 곧바로 하부구조에 대응되는 상부구조의 현상으로, 그리고 계급적 현상으로 단순화시킨 데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의식의 발생만큼이나 오래된 언어는 나와 타자 사이에 소통의 끊임없는 필요와 욕구로부터 발생한 것’인 이상, 일차적으로는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모두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소통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어의 변화는 직접적으로 사회의 발전 단계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내부적 요인들과 그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들(가령, 민족의 이동이나 분열, 다른 민족의 침입이나 지배, 다른 언어들과의 접촉, 사회적 변동이나 발전 등과 같은 것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뿐만 아니라, 한 언어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화 현상들도 단순히 계급적 차별화와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차별화에는 계급적인 것뿐만 아니라, 집단적, 지역적, 정치적, 문화적, 성적, 인종적인 것들도 반영되고 있다.

일반적 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볼로쉬노프의 저작이 갖는 이론적 장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언어적 사실들을 결코 왜곡하거나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언어를 가장 뛰어난 이데올로기적 현상이라고 규정할 때, 언어 자체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중립적이라는 사실 또한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신중한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서는 상부구조에 속하지만, 중립적인 것으로서는 사회 전체에 속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언어의 경계가 계급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확히 한다. 실제로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 상이한 계급들은 동일한 기호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중립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한 볼로쉬노프의 이러한 사실적 지적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르주의에 대한 후견인 구실에 싫증을 내고 이제 스스로 언어학자를 자처하게 되는 1950년의 스탈린의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1934년 마르가 사망한 후에도 추종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그의 학설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1950년 5월 9일부터 7월 4일 사이에 <프라브다> 지에서는 마르의 학설을 놓고 학자들 사이에 공개적인 토론이 진행된다(배후에서 논의를 촉발시킨 것은 아마도 스탈린 자신인 것 같다). 스탈린은 <언어학에서의 맑스주의에 관해서>라는 논설을 통해 이 토론에 직접 개입하면서 마르의 학설을 비판한다. 이것을 두 부분으로 요약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어는 상부구조가 아니며, 계급성을 특징으로 하지 않는다. 언어는 동일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적 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서 공통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가령 혁명 이전의 러시아어와 혁명 이후의 러시아어를 비교해 보면 자명하다.

2)
그리고 언어의 역사적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어서, 언어들 사이의 “교차”는 마르의 주장처럼 새로운 언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언어의 승리로 끝난다. 항상 러시아어가 그랬듯이 말이다. 끝으로 마르는 언어학의 상황을 폭압적인 체제로 만들었으며, 맑스주의와는 상관없는 저급한 내용들을 가지고 혁명 이전의 러시아 언어학의 성과 전체를 부정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이번에는 스탈린의 위와 같은 주장은 언뜻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면에는, 2)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제2차세계대전 후 러시아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연방 체제를 공고히 결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지만. 특히, 1)은 확실히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볼로쉬노프의 사실적인 지적들과도 하등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곰곰이 잘 따져 보면, 스탈린이 주장하는 1)의 내용은 민족어의 단일성과 공통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으며, 동일한 언어 내의 방언적, 지역적, 계층적 변이들과 같은 다양한 차별적 양상들을 간과하고 있다. 반면, 볼로쉬노프의 사실적인 지적들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 언어학의 문제점

그것은 우선 앞서 말했듯이, 언어를 단순히 기계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도식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주의의 촉구이자, 언어란 동일한 언어 공동체의 상이한 구성원들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기호 체계라는 자명한 사실에 대한 재확인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 확인과 더불어 볼로쉬노프가 제기하는 문제틀은 스탈린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동일한 언어 체계를 다양한 개인들이나 상이한 집단들, 계층들, 계급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강조돼야 할 것은 민족어나 사회적 공통어의 단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발화 주체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언어 기호를 사용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를 투영해야 하기에, 상이한 발화 주체들은 개인적이든 계급적이든 간에 어쩔 수 없이 첨예한 모순적인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언어 기호의 이데올로기적 사용과 그 효과에 있어서, 즉 발화의 층위와 담론 형성의 층위에서, 물질적 억압과 착취,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경쟁 등을 반영하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적인 목소리들은 필연적으로 상충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볼로쉬노프의 이상과 같은 문제틀은 확실히 우리가 지난 번 글의 서두에서 밝혔던 의미에서 맑스주의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기계적 유물론이나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판명된 오늘날에 와서 우리에게 더욱더 풍부하게 와 닿는다.

사실, 언어적 소통에서 화자와 청자 혹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현대의 여러 가지 이론적 모형들에서 추상적으로 상정되고 있듯이 그렇게 상호대칭적인 것도 평등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경우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반영하는 지배나 억압의 관계들이 투영돼 있다.

만일 언어에 대한 맑스주의적인 관심이 이러한 것들로부터 나오는 이데올로기적 기만과 편견의 극복, 교묘하든 노골적이든 상징적 조작으로 점철된 권위적 담론에 근거하는 억압적 질서의 전복과 새로운 사회의 기획, 그리고 개성의 투명하고도 풍부한 소통적 발현을 지향한다면, 볼로쉬노프의 지적 노력은 이것을 위한 실로 유효한 실천적ㆍ이론적 첫걸음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끝>


<보론> 맑스주의 철학 재정립을 위한 디딤돌, 볼로쉬노프--최일붕

이기웅 교수의 ‘맑스주의와 언어’ 기고문은 명쾌하고 흥미롭고 신선한 자극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감히 한두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볼로쉬노프의 출발점은 언어가 ‘개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소쉬르와 달리 언어의 가변성을 강조했다. 구조주의자 소쉬르는 언어를 고정 불변의 법칙들의 체계로 봤다. 물론 볼로쉬노프도 언어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언어의 유동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가령 처음에 ‘진보’라는 용어가 소심한 온건 좌파 지도자들이 ‘좌파’라는 말의 대용어로 수세적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했다 해도, 그들과 주류 언론·정당이 ‘진보’라는 말을 ‘사회민주주의’의 대용어로 사용하는 게 보편화된다면, ‘진보’는 좌파 일반이 아니라 단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만을 가리키게 될 것이고,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 왼쪽의 진정한 좌파들은 ‘진보’라는 말의 사용에 신중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유동성 문제는 계급의식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에 큰 함의를 갖는다. 언어가 의식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일진대 만일 언어가 고정 불변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면 계급의식도 가변적이라는 뜻이 된다.

볼로쉬노프가 언어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강조했다 해서 그를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 이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는 낱말 의미의 불안정성을 단연 강조했다.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논의 속에서 언어는 안정성이 무시되고 의미가 파괴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언어 이론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가령 아무리 ‘민족’이라는 말의 뜻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해도 어떤 쓰임새에서든 민족 담론은 계급과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볼로쉬노프의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주의와 학술주의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을 혼란시킨 루이 알튀세르의 유산을 청산하고 루카치 이래 고전 맑스주의의 진정한 철학적 전통을 재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끝)

by cypress | 2008/09/05 14:13 | topic | 트랙백 | 덧글(0)

철학대사전을 팝니다

<철학대사전>을 팝니다. 이렇게 생겼어요.



서지 사항을 보니까, 1989년에 1판이 발행되었고, 저는 1990년에 인쇄된 2판--이라고 해봐야 필름 조금 고친 2쇄겠지요--을 가지고 있네요.
당시 가격이 7만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녘은 당시만 해도 꽤 유명한 운동권 출판사였지요.
본문이 1900페이지 정도 됩니다.
내용이야 당시 동독의 관변 철학(스탈린주의)이고, 동양 철학 편은 마오주의 기반으로 중국에서 편찬된 소사전을 번역한 것입니다. 한 항목씩 골라서 지금 읽어보면, 골 때리게 재미있습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고 <시대와 철학>이라는 무크였다가 계간으로 발행되던 잡지를 내던 젊은 철학자들이 집단으로 작업한 내용물입니다.
책하고 케이스가 있고, 상태는 20년 가까이 돼 가지만 매우 양호합니다. 당시에 무척 신경써서 만들었거든요.

서울에 사시는 분께 직접 전달하는 방식으로 1만원에 드리겠습니다.
두꺼워서 베개나, 서책 본래의 용도 이외의 방식으로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데 참고하기보다는,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가늠해 보고, 이런 고색창연한 책을 모으는 데 취미가 있으신 분한테 권합니다.



by cypress | 2008/09/05 12:11 | sumbolon products | 트랙백 | 덧글(1)

나를 위한 사치품


테레비 위에 올려놨는데 나름 예쁘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하나 질렀다.)
시간과 분이 팔랑개비처럼 넘어간다.
덴마크 산이라는데, 조악하지만 귀엽기도 하다.


by cypress | 2008/09/05 11:52 | 이미지 | 트랙백 | 덧글(5)

강독 모임 자료 다운로드

by cypress | 2008/09/05 11:34 | 중동 | 트랙백 | 덧글(0)

honey, honey

by cypress | 2008/09/04 19:02 | 음악 | 트랙백 | 덧글(2)

캄풍 보이

말레이시아 출신의 만화가 라트(LAT)의 <캄풍 보이>가 꿈틀이라는 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나왔다.



작년부터 내려고 계획했지만 소개해 준 출판사가 내켜하지 않았고, 다른 일정들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던 와중에 독립적으로 작업된 결과를 확인하게 됐다.
박인하와 홍윤표라는 분이 번역했다.
반갑고, 축하할 일이다.
그림체도 신선하고, 내용은 요람기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의 매력이기도 한데, 개별성 속에서 보편성을 확인하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경험이다.
언제 말레이시아 만화를 접해 보겠는가!
더구나 LAT는 홍콩을 아우르는 동남아 권에서 상당히 유명한 카투니스트이다.
번역된 책을 실물로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나는 영어판을 한 권 갖고 있는데, 두 권으로 번역된 한국어판에는 영어판 <캄풍 보이>의 후속작 <타운 보이>가 포함되지 않은 듯하다. (영어판 <캄풍 보이>는 주인공이 도시의 기숙 학교로 유학을 가면서 끝난다.)
한국어판의 1권은 영어판 <캄풍 보이>가 맞는 것 같다.
그리고, 한국어판의 2권은 '시골' 생활을 소개하는 <캄풍 보이>의 방계 작품인 것 같다.
(말레이시아 현지에서 최초로 영어판 만화가 소개되었고, 상당한 텀을 사이에 두고 만화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캐릭터 사업도 이루어졌으므로 소품들도 많은 것 같은데, 그것들을 추리거나 가져다가 2권을 만든 듯하다. 아무튼 <타운 보이>는 안 나온 것 같다.)

이 책은 진행하는 강독 모임의 읽을거리이고, 사실 그래서 이 포스팅을 하는 것인데....
강독 참가자들께서 디스커버리 채널의 편성표를 확인하시고, <크로싱: 만화가, 라트>라는 프로그램을 꼭 보셨으면 해서다.
내가 지금 확인한 바로는 9월 3일 새벽 4시로 되어 있는데,,,,
디스커버리 채널 편성표가 부실하므로 직접 한 번 들어가서 확인하시기를 바란다.
http://www.discoverychannel.co.uk/int/
TV schedule 디렉토리에 들어가면 한국어 편성표를 볼 수 있다.
(디스커버리 아시아 쪽 본사가 홍콩 아니면 싱가포르 정도에 있는 것 같다. 말레이시아 메르데카 특집의 일부로 <라트>가 여러 차례 방송될 것이다.)
만화가 라트와 캄풍 보이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다.

Kampung은 말레이어로 '시골', '고향'이라는 뜻을 가진다고 한다.
강독 모임 준비하느라 구글 어스로 조낸 찾았는데도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보통 명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라트의 출생지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 지명인 줄 알았다.

한국어판이 미간행일 것으로 추정되는 LAT의 <타운 보이>의 재킷



 ref) 참고로, 만화책 출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http://www.firstsecondbooks.com/



by cypress | 2008/08/29 03:48 | preview & review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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