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주의와 언어
<맞불>이 제호를 바꿔 내는 신문 <저항의 촛불>에 실린 글이다. 이 신문의 먼 전신에서 한때 편집일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신문이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어디서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읽겠는가? (레디앙이나 프레시안에서? ㅋ ㅋ )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사이트를 방문해서 기사를 읽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후원도 할 수 있다. www.resistcandle.com 이기웅 교수와 보론을 쓴 최일붕 선배는 학교 선후배 사이이다. 더 사적인 내용도 조금 아는데, 그건 내 몫으로 남겨둬야겠다.
※ 이기웅 교수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러시아어 언어철학을 전공했다. 필자는 ‘다함께’가 주최하는 ‘맑시즘2008’에서 ‘맑스주의와 언어’라는 주제로 연설한다. (8월 17일(일) 오전 10시) 이 글은 이기웅 교수가 기고한 글의 첫 번째 부분으로 다음 호에 후속편이 실릴 것이다.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의 성공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혁신하려는 거대한 실천적인 시도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연히 이와 더불어 현실의 많은 것들을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새롭게 구성해 내려는 지적인 노력들의 유례없는 활성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인 노력들의 발전적인 행로는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전범으로 참조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들은 그 출발부터가 다분히 암중모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가령 언어학이나 문학, 미술 등과 같은 여러 분야에서 상이한 입장들과 경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게 됐다. 이 때문에 1920년대 러시아는 새로운 시도들로 넘쳐나는 역사상 가장 활발한 문화적 분위기였지만, 또한 이들 사이의 경쟁적인 갈등과 상충도 함께 있는 다소 혼재된 시기이기도 했다.
둘째, 이러한 와중에, 스탈린주의의 득세로 요약될 수 있는 사회·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서 그러한 지적인 노력들과 열망들은 일시에 억압적인 궁지로 내몰리게 된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일국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그러나 그것의 실제적인 내용은 민족주의와 강압적인 국가자본주의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차례차례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1928년 무렵 권력을 독점하게 된 스탈린은 그 다음 해에 실로 괴물과 같은 방식으로 예술과 학문의 전 분야를 “단일지도”의 원칙에 따라 재조직화를 착수한다.
이것은 각 분야마다 권력 당국이 지정한 책임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인데, 이에 따라 당연히 예술가들이나 연구자들의 자율성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그 앞을 기다리고 있는 이처럼 험난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시도된 맑스주의적인 시각에 입각한 다양한 지적인 노력들이 오늘날까지도 내용적으로 많은 점에 있어서 그 유효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을 규정하는 다음과 같은 방법적 토대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현실 속에 주어진 어떤 현상을 맑스주의적으로 규명한다는 것은 그것을 역사유물론에 기초해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여기서 변증법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주어진 현상의 고찰에 있어서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종합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설명적 노력은 당연히 올바른 실천적인 방향성의 정립과도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이란 궁극으로 인간이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물질적 속박과 이로 인한 사회적 착취와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만큼 역사 또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총체화 과정 속에서 자리매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총체적
이상의 것을 전제로 놓고 볼 때,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기호적 활동인 언어를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규명하려는 대표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가 볼로쉬노프(В. Н. Волошинов, V. N. Voloshinov; 1895~1936)의 《맑스주의와 언어철학》(1929)이다.[이 책은 푸른사상 출판사에서 《언어와 이데올로기》란 제목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편집자]
먼저 이 책의 전체적인 집필 의도에 따르면, 맑스주의에서 언어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언어와 이데올로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데올로기란 원래 맑스가 생각한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 즉 과학적 의식과 대립하는 허위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맺는 제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가치평가’라는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총체적으로 볼 때, 사회의 상부구조로서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궁극으로 결정하는 물질적 토대인 하부구조와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것을 잘 반영하는 것이 그리고 또한 자기 내부의 법칙에 따라 굴절시켜서 현실로 되돌려 보내기도 하는 것이 바로 가장 일반적인 사회적 기호체인 언어이다.
그런데 여기서 볼로쉬노프가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 어휘체계나 문법체계의 층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소통행위를 구성하는 발화(發話)[소리를 내어 말을 하는 현실적인 언어 행위: 편집자]의 층위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어의 본질적 기능이 소통에 있는 이상, 언어 연구의 초점 또한 당연히 발화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소통의 상황과 문맥,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사회적 구조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발화행위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기에, 확실히 발화는 본질적으로 언어 기호의 변증법적 총체성을 잘 구현하고 있는 언어적 사실이다.
이 점은, 가령 아주 간단한 예로서, “경찰이다!”라는 표현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화되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실제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발화의 층위에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을 위치시키면서, 볼로쉬노프는 기존의 언어 연구들을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분류하고, 양자 모두를 비판한다.
하나는 언어가 민족정신이나 민족의 세계관, 민족심리, 혹은 민족의 미의식 등을 고유하게 반영하는 활동이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내는 활동으로서 개인의 언어적 창조성을 강조하는 경향인데 (헤르더 Herder, 훔볼트 Humboldt, 쉬타인탈 Steintahl, 분트 Wundt, 포슬러 Vossler 등), 볼로쉬노프는 이러한 경향을 과학성이 결여된 ‘개인적 주관주의’라고 비판한다.
다른 하나는 소쉬르(Saussure)의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과학적 경향이다. 이에 따르면, 언어의 본질은 개인의 말이나 발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동시대에 개개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잠재적인 사회적 기호체계에 있으므로, 그러한 체계를 구성하는 구조적 사실들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기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입장을 볼로쉬노프는 ‘추상적 객관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 같은 기술은 언어기호가 발화를 통해서 표현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실제적인 뜻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화법
사실, 이러한 비판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언어와 연관된 다양한 현상들을 소쉬르나 볼로쉬노프 모두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론화시키는 데 있어서 두 사람의 주안점이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우리가 든 예를 갖고 생각해보면, 소쉬르는 어느 누가 “경찰이다!”라는 표현을 발화하든지간에 모두 동일한 기호에, 따라서 동일한 ‘의미’(значение; meaning 혹은 signification)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볼로쉬노프는 그러한 동일성 위에 얹혀지는 상이한 발화자들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억양들, 목소리들, 실제적인 ‘뜻’(тема; theme)들의 현실적 중요성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물론 볼로쉬노프가 소쉬르의 문제의식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언어기호에서 ‘의미’와 ‘뜻’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주된 근거는 개인의 발화가 아무리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것처럼 보여도 본질적으로 타인을 지향하는 대화적 성격을 가졌으며, 발화의 이러한 대화적 구조를 규정하는 궁극적 요인이 바로 사회-이데올로기적인 사실들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볼로쉬노프는 책의 마지막 부분을 ‘화법’이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언어 현상의 분석적 고찰에 할애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타자의 말의 재현 형식으로서 화법조차도 그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재현하는 발화자의 사회-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된 가치평가적 태도가 덧씌워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 준다.
요컨대,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단지 언어 내부로만 분석의 시각을 국한시키는 연구는 불충분할 수밖에 없으며,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어가 ‘인간의 현실적 의식’인 이상 그것을 구성하는 계기들을 종합화하는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로쉬노프의 이러한 이론적 노력은 1960년대까지 국제 학계에서는 물론 소련 내에서도 잊혀져 버린다.
1920년대부터 언어 연구의 국제적인 흐름은 소쉬르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구조주의가 주도적이었으며, 소련의 경우는 스탈린주의의 후견 아래 기계적 유물론을 강조하는 마르(Marr)의 교조적인 이론이 1929년부터 무시무시한 ‘감독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령, 이에 맞서 학문적 논쟁을 벌인 활동적인 맑스주의자이자 천재적인 언어학자였던 폴리바노프(Polivanov)는 박해를 받다 1938년에 총살당했던 것이다.
볼로쉬노프의 경우는 스스로 학문적 노력을 접은 채 침묵하다 요절했으며, 이러한 그의 저서가 마침내 재발견된 것은 소쉬르 식의 구조주의의 한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의 서구학계에서부터였다. (계속)
지난 호에 이어 이기웅 교수의 ‘맑스주의와 언어’ 후속편을 싣는다. 이기웅 교수는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러시아어 언어철학을 전공했다. 필자는 최근 ‘다함께’가 주최한 맑시즘2008에서 같은 주제로 연설한 바 있다.
지난 호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데올로기와 언어의 밀접한 연관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면서 언어 현상을 발화(發話) 차원에서 고찰할 필요성을 규명하고 있는 《맑스주의와 언어철학》[국역: 《언어와 이데올로기》, 푸른사상 간]에서, 볼로쉬노프가 보여 주는 이론적 신중함과 미덕은 가령 기계적 유물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마르의 언어 이론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면 먼저 마르의 학설 중에서 우리의 논의와 관계되는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어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상부구조에 속한다. 따라서 언어의 발전 단계는 사회의 발전 단계에 대응된다. 그리고 계급적이지 않은 사고가 없는 것처럼 계급적이지 않은 언어도 없다. 심지어 동일한 민족의 경우에도 상이한 계급들을 초월하는 민족 공통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상이한 계급적 언어들 및 이들 사이의 교차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만일 거기에 어떤 공통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교차의 반영으로서 궁극적으로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
2) 그리고 동일한 사회구조를 갖는 나라들의 동일한 계급의 언어들은 동일 민족 내의 상이한 계급들의 언어들보다도 유형적으로 더 큰 유사성을 갖는다. 따라서 모든 상이한 언어들은 장차 인류가 공산주의 사회로 발전해 감에 따라 하나의 단일한 유형의 언어로 귀결될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터무니없이 사변적인 2)에 비해서 1)은 언뜻 보면 다소 그럴 듯도 해 보인다.(그런데 스탈린은 당시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필요한 것이 2)의 부분이었는지, 1930년 제16차 전소연방 공산당 대회의 연설에서 그것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인용한다.)
그러나 주장 1)의 이론적 근거이자 치명적 오류는 언어를 곧바로 하부구조에 대응되는 상부구조의 현상으로, 그리고 계급적 현상으로 단순화시킨 데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의식의 발생만큼이나 오래된 언어는 나와 타자 사이에 소통의 끊임없는 필요와 욕구로부터 발생한 것’인 이상, 일차적으로는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모두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소통 수단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어의 변화는 직접적으로 사회의 발전 단계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내부적 요인들과 그것을 둘러싼 여러 가지 외부적 요인들(가령, 민족의 이동이나 분열, 다른 민족의 침입이나 지배, 다른 언어들과의 접촉, 사회적 변동이나 발전 등과 같은 것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다. 뿐만 아니라, 한 언어 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적 차별화 현상들도 단순히 계급적 차별화와 대응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차별화에는 계급적인 것뿐만 아니라, 집단적, 지역적, 정치적, 문화적, 성적, 인종적인 것들도 반영되고 있다.
일반적 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
볼로쉬노프의 저작이 갖는 이론적 장점 중의 하나는 이러한 언어적 사실들을 결코 왜곡하거나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는 언어를 가장 뛰어난 이데올로기적 현상이라고 규정할 때, 언어 자체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중립적이라는 사실 또한 이야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이러한 신중한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서는 상부구조에 속하지만, 중립적인 것으로서는 사회 전체에 속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언어의 경계가 계급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확히 한다. 실제로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에서 상이한 계급들은 동일한 기호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중립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성격에 대한 볼로쉬노프의 이러한 사실적 지적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르주의에 대한 후견인 구실에 싫증을 내고 이제 스스로 언어학자를 자처하게 되는 1950년의 스탈린의 태도와 과연 무엇이 다른 것일까?
1934년 마르가 사망한 후에도 추종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그의 학설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1950년 5월 9일부터 7월 4일 사이에 <프라브다> 지에서는 마르의 학설을 놓고 학자들 사이에 공개적인 토론이 진행된다(배후에서 논의를 촉발시킨 것은 아마도 스탈린 자신인 것 같다). 스탈린은 <언어학에서의 맑스주의에 관해서>라는 논설을 통해 이 토론에 직접 개입하면서 마르의 학설을 비판한다. 이것을 두 부분으로 요약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어는 상부구조가 아니며, 계급성을 특징으로 하지 않는다. 언어는 동일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적 활동의 전 영역에 걸쳐서 공통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가령 혁명 이전의 러시아어와 혁명 이후의 러시아어를 비교해 보면 자명하다.
2) 그리고 언어의 역사적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어서, 언어들 사이의 “교차”는 마르의 주장처럼 새로운 언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언어의 승리로 끝난다. 항상 러시아어가 그랬듯이 말이다. 끝으로 마르는 언어학의 상황을 폭압적인 체제로 만들었으며, 맑스주의와는 상관없는 저급한 내용들을 가지고 혁명 이전의 러시아 언어학의 성과 전체를 부정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이번에는 스탈린의 위와 같은 주장은 언뜻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면에는, 2)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제2차세계대전 후 러시아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연방 체제를 공고히 결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지만. 특히, 1)은 확실히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볼로쉬노프의 사실적인 지적들과도 하등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곰곰이 잘 따져 보면, 스탈린이 주장하는 1)의 내용은 민족어의 단일성과 공통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으며, 동일한 언어 내의 방언적, 지역적, 계층적 변이들과 같은 다양한 차별적 양상들을 간과하고 있다. 반면, 볼로쉬노프의 사실적인 지적들은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스탈린 언어학의 문제점
그것은 우선 앞서 말했듯이, 언어를 단순히 기계적 유물론에 입각해서 도식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주의의 촉구이자, 언어란 동일한 언어 공동체의 상이한 구성원들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기호 체계라는 자명한 사실에 대한 재확인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 확인과 더불어 볼로쉬노프가 제기하는 문제틀은 스탈린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동일한 언어 체계를 다양한 개인들이나 상이한 집단들, 계층들, 계급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강조돼야 할 것은 민족어나 사회적 공통어의 단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발화 주체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언어 기호를 사용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이해관계를 투영해야 하기에, 상이한 발화 주체들은 개인적이든 계급적이든 간에 어쩔 수 없이 첨예한 모순적인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언어 기호의 이데올로기적 사용과 그 효과에 있어서, 즉 발화의 층위와 담론 형성의 층위에서, 물질적 억압과 착취, 잉여가치의 획득을 위한 경쟁 등을 반영하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적인 목소리들은 필연적으로 상충적일 수밖에 없다.
언어에 대한 볼로쉬노프의 이상과 같은 문제틀은 확실히 우리가 지난 번 글의 서두에서 밝혔던 의미에서 맑스주의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이론적, 실천적 함의는 역설적이게도 기계적 유물론이나 스탈린주의의 폐해가 역사적으로 판명된 오늘날에 와서 우리에게 더욱더 풍부하게 와 닿는다.
사실, 언어적 소통에서 화자와 청자 혹은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현대의 여러 가지 이론적 모형들에서 추상적으로 상정되고 있듯이 그렇게 상호대칭적인 것도 평등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많은 경우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반영하는 지배나 억압의 관계들이 투영돼 있다.
만일 언어에 대한 맑스주의적인 관심이 이러한 것들로부터 나오는 이데올로기적 기만과 편견의 극복, 교묘하든 노골적이든 상징적 조작으로 점철된 권위적 담론에 근거하는 억압적 질서의 전복과 새로운 사회의 기획, 그리고 개성의 투명하고도 풍부한 소통적 발현을 지향한다면, 볼로쉬노프의 지적 노력은 이것을 위한 실로 유효한 실천적ㆍ이론적 첫걸음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끝>
<보론> 맑스주의 철학 재정립을 위한 디딤돌, 볼로쉬노프--최일붕
이기웅 교수의 ‘맑스주의와 언어’ 기고문은 명쾌하고 흥미롭고 신선한 자극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감히 한두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볼로쉬노프의 출발점은 언어가 ‘개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 현상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소쉬르와 달리 언어의 가변성을 강조했다. 구조주의자 소쉬르는 언어를 고정 불변의 법칙들의 체계로 봤다. 물론 볼로쉬노프도 언어에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언어의 유동성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가령 처음에 ‘진보’라는 용어가 소심한 온건 좌파 지도자들이 ‘좌파’라는 말의 대용어로 수세적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했다 해도, 그들과 주류 언론·정당이 ‘진보’라는 말을 ‘사회민주주의’의 대용어로 사용하는 게 보편화된다면, ‘진보’는 좌파 일반이 아니라 단지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만을 가리키게 될 것이고,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주의 왼쪽의 진정한 좌파들은 ‘진보’라는 말의 사용에 신중하게 될 것이다.
언어의 유동성 문제는 계급의식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에 큰 함의를 갖는다. 언어가 의식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일진대 만일 언어가 고정 불변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면 계급의식도 가변적이라는 뜻이 된다.
볼로쉬노프가 언어의 유동성과 가변성을 강조했다 해서 그를 포스트구조주의의 언어 이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는 낱말 의미의 불안정성을 단연 강조했다. 포스트구조주의자의 논의 속에서 언어는 안정성이 무시되고 의미가 파괴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언어 이론 자체가 무의미해져 버렸다. 가령 아무리 ‘민족’이라는 말의 뜻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해도 어떤 쓰임새에서든 민족 담론은 계급과 계급투쟁의 현실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볼로쉬노프의 《언어와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주의와 학술주의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을 혼란시킨 루이 알튀세르의 유산을 청산하고 루카치 이래 고전 맑스주의의 진정한 철학적 전통을 재정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끝)